삼성전자, 반도체 협력사들에 '비밀유지각서' 받았다

지난달 김기남 부회장 명의로 국내외 협력사에 발송 부품 및 소재 관련 주요 협력사들에 기술유출 보안 요구 핵심 협력사들에는 1억원 이상 '위약벌' 손해배상도 명시

2021-08-24     이나리 기자
삼성전자
삼성전자가 최근 국내외 반도체 부품·소재 협력사들에 '비밀유지 계약서'를 발송한 것으로 확인됐다. 반도체 공정·기술 및 개발 정보가 협력사를 통해 외부로 유출될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다. 특히 몇몇 핵심 협력사에는 경쟁사 인력을 채용할 경우 2년간 삼성전자 관련 업무에서 배제하고, 협력사 인력이 퇴직 후 1년 이내에 경쟁사로 이직한 사실을 알게 된 경우 삼성전자에 알리도록 했다. 이를 어길 경우 최소 1억원을 손해배상하도록 하는 규정도 계약서에 담았다.  반도체 업계에선 자사 인력의 경쟁사 이직에 제동을 거는 일은 종종 있었으나, 이번처럼 협력사의 경쟁사 인력 채용까지 제한하는 건 극히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삼성전자의 요구에 일부 협력사는 "과도한 간섭 아니냐"고 불만을 토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4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지난 7월 국내 및 해외 주요 협력사들에 비밀유지계약서를 보내, 서명할 것을 요청했다. 해당 계약서는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 실무진에서 작성해, 김기남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 명의로 발송됐다. 발송대상은 국내외 주요 부품·소재 협력사들이다. 이 계약서는 모든 부품·소재 협력사에 보내진 것은 아니며, 반도체 공정 및 기술개발과 관련도가 높은 일부 협력사에 발송된 것으로 확인됐다. 글로벌 기업의 한국지사와 일본 기업들에도 보냈다. 다만, 장비 관련 협력사에는 발송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계약서는 최소 두 버전으로 보내졌다. 핵심공정·기술 개발 관여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곳에는 통상적인 수준의 비밀유지계약서를 발송했다. 하지만 삼성전자의 핵심 공정 및 기술개발에 관여도가 큰 협력사에는 6쪽 분량의 계약서를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6쪽짜리 계약서에는 기술유출 방지를 위한 각종 제한사항이 담겼다. 본지가 입수한 계약서 사본에 따르면, 우선 협력사가 직전 2년 이내에 삼성전자 경쟁업체에 몸담은 임직원을 영업·개발·품질부서 팀장급 또는 임원으로 영입할 경우, 해당 직원을 2년 동안 삼성전자의 비밀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업무에서 배제하도록 했다. SK하이닉스, 인텔, TSMC 등에서 근무한 인력을 영입해도 삼성전자와 관련된 업무는 맡기지 말라는 얘기다.  계약서에는 협력사 직원의 이직에 대한 제한 규정도 들어 있다. 삼성전자와의 거래에 깊숙이 관여한 임직원(비밀정보 접근업무)이 퇴직 후 1년 내 삼성전자의 경쟁업체로 옮긴 걸 알게 된 경우, 해당 사실을 삼성전자에게 즉각 알리고 정보유출로 인한 손해를 최소화할 수 있게 협조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 같은 조항을 어길 경우 협력사는 1억원을 손해배상 명목의 '위약벌'로 삼성전자에 지급해야 한다는 문구도 계약서에 담겨 있다. 
삼성전자
이번 삼성전자의 비밀유지 계약서는 극히 이례적이라는 게 업계 중론이다. 계약서 문구 하나하나가 통상적인 수위보다 높은 요구조건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다. 일각에선 최근 무진전자 기술유출 건과 관련이 있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올해 초 무진전자 임직원이 삼성전자의 장비 자회사인 세메스의 핵심 기술을 중국 쪽에 유출시키려다 검찰에 적발됐다. 이에 삼성전자는 지난 6월 무진전자와의 반도체 유통 계약을 종료하면서 거래관계를 끊었다. 무진전자 사건이 이번 비밀유지 계약서의 출발점으로 볼 수 있는 셈이다. 삼성전자 측은 "비밀유지 계약서는 삼성전자의 기술 유출을 방지하고, 협력사의 기술도 보호하기 위한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삼성전자의 요구에 대다수 국내 협력사와 일본 업체들은 계약서에 이미 서명을 마친 상태다. 대형 고객사인 삼성전자와의 거래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다. 다만 일본 기업을 제외한 글로벌 협력사들의 한국 지사는 아직 해당 계약서에 서명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계약서와 관련, 일부 협력사들에선 불만도 적지않게 나오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협력업체 관계자는 "삼성전자가 핵심기술 유출을 사전에 막아보겠다는 취지는 십분 이해하지만, 협력사의 외부 우수인력 채용 및 업무배치까지 관여하는 건 과도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