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경종민 KAIST 교수, "단기 성과에 집착해선 글로벌 반도체 기업 배출 어렵다"

[한국반도체공학회-디일렉 공동기획] 한국 반도체산업, 미래를 그리다② 경종민 KAIST 전기·전자공학부 명예교수 인터뷰 "국내 반도체 창업 생태계, 단기적인 성과에만 집중하고 있어" "인내심 가지고 보다 원대한 목표 구상할 수 있는 환경 중요" "산학연 및 정부 간 협력으로 유기적인 에코 시스템 갖춰야"

2022-12-24     장경윤 기자
경종민

미·중 경제패권 전쟁이 확전 양상이다. 트럼프 집권 이후 벌써 5년 넘게 두 경제대국의 주도권 다툼이 이어지고 있다. 바이든 시대에서도 마찬가지다. 반도체 공급망을 두고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압박, 그런 미국에 맞서려는 중국의 대응이 본격화하는 모습이다. 

미·중 패권전쟁은 대한민국을 먹여살리는 핵심 산업인 반도체, 이른바 K반도체에도 중대한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K반도체는 위기를 맞을까, 아니면 기회를 찾을 것인가? 

<디일렉>은 한국반도체공학회와 공동으로 한국 반도체 산업의 미래를 짚어보는 기획을 시작했다. 국내 반도체 석학, 반도체 업계의 구루와의 릴레이 인터뷰를 통해 우리 반도체 산업의 지속발전을 위한 혜안을 구한다.  공동기획 두 번째로 경종민 KAIST 전기·전자공학부 교수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경종민 교수는 국내 시스템반도체 분야 '구루(GURU)'다. 서울대 전기·전자공학과 학사, KAIST 석·박사 출신으로 40여년간 KAIST에서 후학을 양성해왔다. 지난 2011년부터 스마트IT융합시스템연구단의 단장을 맡으며 반도체 및 4차산업과 관련한 수많은 스타트업을 배출하기도 했다. 경 교수 본인도 다수의 창업 이력을 가지고 있다. 경 교수는 현재 국내 반도체 창업 생태계에 대해 "가시적이고 단기적인 성과만을 중시하는 태도, 정부 지원금과 대기업에만 의존하는 시스템에서는 글로벌 기업들과 어깨를 견줄 수 있는 스타트업이 나올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미래의 반도체 인재와 스타트업이 보다 장기적이고 높은 차원의 목표를 가지려면 산학연 및 정부가 유기적인 에코시스템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며 "이는 단순히 이공계만이 아니라 사회·문화를 비롯한 거시적인 관점에서 고민해야 할 문제"라고 강조했다.  아래는 경종민 교수와의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Q. 교수님은 반도체 학계에서 '구루'로 통합니다. 원래부터 반도체 설계를 공부하셨나요?

A. 제가 1975년도에 서울대를 졸업하고 카이스트에서 석·박사 과정을 밟았는데, 석·박 과정과 미국 벨랩에서 맡았던 분야는 피직스(PhysX), 소자, 공정, 소자 모델링 쪽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983년도에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무슨 일을 해야할까"하고 고민해보니, 반도체 설계 쪽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때부터 CAD를 독학하기 시작했죠. 낮에는 카이스트 전기및전자공학전공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밤에는 공부를 하는, 그런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CAD 알고리즘, EDA툴 등을 공부했고, 이를 기반으로 반도체 회로를 설계하고 검증하는 연구를 한창 했죠.

Q. 교수 재직 기간에 양성한 제자들도 참 많을 것 같습니다.

A. 100명이 훌쩍 넘죠. 산업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도 있고 은퇴한 사람도 많습니다. 저와 나이가 5~6살 차이나는 사람들은 삼성에서도 사장이나 부사장을 하다가 은퇴하기도 했죠. 같이 늙어간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Q. 수많은 연구 중에서도 1990년대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직접 개발하신 사례가 큰 주목을 받았죠?

A. 아까 제가 CAD 알고리즘을 연구한다고 했는데, 초기에는 ASIC(주문형 반도체) 설계를 위주로 했습니다. 그러다가 당시에 인텔이 독보적으로 영역을 확대하고 있던 프로세서 쪽도 한번 개발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RISC(IBM이 발표한 명령어집합)가 뜨고 있을 때였죠. 다만 RISC는 툴을 만들 때는 쉬운데 컴파일러는 매우 어렵습니다.

마침 당시 정부에서 386칩셋(인텔이 1985년도 개발한 마이크로프로세서) 관련 공고가 났습니다. CPU 말고 주변 칩을 만드는 거였죠. 무리수 같지만 저는 여기서 "그러지 말고 CPU를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당연히 심사위원들은 "성공할 수 있겠냐"며 굉장히 비관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그래도 저는 "인텔 386칩 뽑아버리고 우리 칩으로 프로그램 돌리겠다"고 끝까지 밀어붙였죠. 결국 92년에 과제를 시작해서 97년도에 칩을 완전히 개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실제로 인텔의 칩을 뽑고 저희가 만든 'HK386' 칩으로 윈도우 운영체제와 소프트웨어를 다 구동했죠. 엄청난 일을 한건데, 제가 미숙해서 이걸 사업적으로는 연결을 못했습니다. 당시 저희 학생들과 현대전자 연구원들이 칩 제작에 많은 노력을 쏟아부었는데 참 아쉽습니다.

Q. 과제를 시작하시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IDEC(반도체설계센터)도 설립하셨습니다.

A. 그때 정부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비축자금이 좀 있는데 전자부품 쪽에서도 인프라와 관련한 아이디어를 냈으면 좋겠다고 했었죠. 그래서 제가 반도체 설계인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정부 쪽에서는 "그게 무슨 인프라냐"라고 했는데, 설계와 시스템반도체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게 인력입니다. 이런 식으로 말했더니 정부도 결국 제 주장을 받아들였죠. 다만 예산이 충분하지는 않았습니다. 반도체 설계 소프트웨어가 대부분 미국 회사 소유인데, 이들 기업에게는 "학생들이 지금 너희 소프트웨어로 연구를 해야 취업을 해서도 너희걸 쓸거다"라고 설득을 했습니다. 지금은 공짜로 쓰고 나중에 갚겠다는 거였죠. 그래서 거의 모든 소프트웨어를 대부분의 대학에 보급할 수 있었습니다. 삼성전자와 현대전자 쪽도 "대학에서 연구를 많이 해야 회사에 입사해서 실수를 안 한다"라는 말로 설득했습니다. 이를 통해 칩을 거의 공짜로 만들어주는 시스템을 만들었죠. 그래서 반도체 설계 인프라를 제주에 있는 대학까지 보급할 수 있었습니다.

Q. 40년 넘게 반도체를 연구하신 구루로서, 한국의 시스템반도체 역량은 어떻게 보십니까?

A. 한국 사람이 제일 잘 하는 게, 목표가 정해지면 달라붙어서 단기간에 성과를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메모리에 비해서 시스템반도체는 기술을 개발하고시장에 파고들어 돈을 벌 때까지의 파이프라인이 굉장히 깁니다. 때문에 학생들도 미리 트레이닝을 제대로 받아야 하죠. 조금 더 인내심을 가지고, 더 장기적인 안목에서 플랫폼을 형성해 교육해야 합니다. 논문 몇개로 졸업을 하고, 교수도 이를 기반으로 승진하는 등 이런 스펙 기반으로 시스템을 운영하면 큰 나무가 자라기 힘듭니다. 구글이나 애플 등 글로벌 수준의 회사를 배출하고 싶다면 작은 성공에 만족하지 않고 끝까지 달려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죠. 더 높은 곳까지 갈 수 있는 비전과 그런 것들을 북돋아주는 분위기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Q. 인력 측면에서의 경쟁력은 어떻습니까?

A. 인재도 많이 줄었죠. 왜냐하면 반도체 설계 자체가 AI, 빅데이터 등에 비해서 아웃풋을 낼 때까지의 기간이 깁니다. AI는 구글이 제공하는 소프트웨어가 있어서 조금만 개발해보면 일단 뭐가 나오는데, 반도체는 그렇지 않죠. 그런데 대학에서 교수나 학생이 스펙만을 중시하다보니 세계적인 수준의 기술을 이끌고 갈 사람들이 성장하기가 힘듭니다. 숫자도 문제지만 더 중요한건 질입니다. 국제적인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인프라, 희망의 깃발을 보여줘야 할 선구자들이 필요한데 그런게 잘 보이지 않습니다.

Q. 마이크로프로세서나 IDEC과 비교해보면, 반도체에 대한 정부 지원도 과거보다 줄어든 게 아닌가요?

A. 우리나라는 반도체 산업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 대학의 기능이 살아나기가 힘듭니다. 대학도 목표를 높이고 장기적으로 영향력 있는 연구를 해야 하는데, 삼성과 SK하이닉스 등 기업이 역할을 주도하는 걸로 되어있죠. 물론 삼성이 잘 하기는 하지만, 혼자 잘 해서는 안됩니다. 산업 생태계나 인력 양성, 연구개발을 아우르는 에코 시스템이 살아나야 삼성도 살아납니다. 너무 삼성 쪽에만 매달리는 건 길게 보면 옳지 않습니다.

그런데 정부는 삼성만을 보고 있습니다. 수출을 얼마나 했느냐 등 너무 단기적인 목표에 집중하고 있고, 삼성에서도 매년 임원인사를 진행하다보니 장기적인 프로젝트를 꿋꿋하게 밀고 갈 수 있는 시스템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국가를 꿰뚫는 대동맥과 같은 파이프라인이 없다는 건데, 대만에는 이게 있습니다. 대만은 전국 대학이 ITRI(산업기술연구소)로 연결이 돼 있어서 국가의 연구개발의 20%를 담당하고 있죠. 우리나라 기관은 1%도 안될겁니다. 대만의 신주를 보면 거기가 과학 중심의 산업단지인데, 연구소가 있으면 그 앞에 학교가 있습니다. 또 그 옆에는 관련 업체들이 있고 근린시설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나온게 대만 파운드리 업체 TSMC인데, 그야말로 생태계를 아우르는 비전을 가지고 있죠. 고객사를 뺏기느냐 지키느냐에 영향을 받는 삼성하고는 다릅니다. 이런 관점은 단순히 이과적인 마인드만으로는 갖출 수 없습니다. 산업 외에도 사회·문화적인 요소를 고려해야 하죠. 우리나라는 급격한 성장을 이뤄내느라 척박한 길을 걸어왔습니다. IMF가 있을 적에도 이공계 인재를 먼저 잘라버리고, 기술은 사오면 된다는 태도였죠. 그 결과 기본이 되는 인프라가 죽어버렸습니다. 지금의 출산율과 결혼율이 낮은 이유도 사회 비전과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공계의 영역은 아니지만, 이공계에서도 기반 기술을 열심히 발전시켜 돈도 많이 벌고 사회에 기여하는 방식으로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Q. 현재 대한민국의 반도체 창업 생태계의 문제점은 무엇인가요?

A. 너무나 정부 의존적입니다. 정부 모태펀드가 생태계를 좌지우지하는데, 모태펀드를 받은 VC들이 기술에 대해 깊이 알아보기보다는 책잡히지 않을 투자만 하고 있습니다. 또 단기적 성과를 낸 뒤에 치고 빠지는 부분도 있죠. 사실은 이런 자금이 정부의 모태펀드만이 아니라 산업계에서 나와야합니다. 대기업들도 갑을 관계가 아니라 상호공존하고 도와주는 식으로 투자를 해줘야 합니다.

대학에서도 나이가 70이 넘어서도 힘차게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해요. 혁신이라고 하는 건 융합과 항상 같이 일어나는 건데, 다른 분야에 있는 것들을 서로 융합하려고 하면 뼈를 깎는 창의력이 있어야 합니다. 저희가 마이크로프로세서를 만들 당시만 해도 학생들이 자기가 만든 칩이 윈도우에서 돌아가는 걸 보고 자신감이 충만해졌습니다. 이 학생들은 뭐든지 다 할 수 있죠. 저는 과제 수행하면서 5년간 낸 논문이 0개였습니다. 물론 좋은 저널에 논문을 싣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아야 할 분야가 많다는 거죠. 고객사의 지갑을 여는 건 더 혹독하고, 그래서 시장에서 받아들여지는 것들을 분석해야 합니다. 해외를 보자면 스탠포드나 버클리에서는 창업을 안하면 주눅이 드는 환경입니다. 학생들도 대기업에 가는 게 1순위가 아니고 창업이 1순위죠. 2순위가 교수로 가고 3순위가 구글이나 애플 등 대기업으로 갑니다. 반면 한국은 1군이 삼성에 가고, 창업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인 분위기입니다.

Q. 교수님도 창업을 여러 번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눈여겨 볼 사례가 있다면요.

A. 지금까지 창업을 여러 번 하기도 했고, 사람들에게 여러 번 하도록 독려하기도 했습니다. 국내 전자현미경 1등과 2등 업체 CEO가 모두 제 제자입니다. 사실 반도체와 전자현미경 간에 별 관계는 없는데, 예전에 있던 통신용 반도체 회사에서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경험을 쌓더니 그 분야로 창업을 하더라구요. 또 KAIST 교수도 한 분 계신데, 고속 트랜시버 반도체 설계 기술을 가지고 그 분이 창업을 한 4번 정도 하셨습니다. 저도 그래서 다른 교수님들한테는 이 교수를 모범적인 케이스로 소개하곤 하죠. 기반 기술로 시장에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일 등을 다 하셨습니다.

Q. 교수 창업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도 있는데요. 

A. 그 부분은 교수가 낄 때 신나게 끼고, 빠질 때 빠져주면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교수가 창업을 해놓고 CEO도 안하고 대주주로 뒤에서 조종만 하는 등 자기 역할을 다 하지 않으면, 회사가 잘 될 수 없습니다. 회사에 기여하는 만큼 주식이나 권한 행사를 잘 조절해야 하면 되죠.

Q. 반도체 업계에서 창업을 한다고 하면, 어떤 분야가 유망하다고 보십니까?

A. 세계 시장은 굉장히 큰 하나의 시스템이고, 때에 따라서 압력이 커지는 분야가 있습니다. 시장을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들이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커뮤니케이션을 하기 때문에 수시로 변하죠. 그래서 어느 분야가 유망하다고 하는 것은 주식 시장에서 주가가 오르내리는 것처럼 예측이 어렵습니다. 중요한 건 시장을 잘 들여다보면서 자기 기술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생각하는 과정 자체가 굉장히 바람직한 연구개발이고 교육 모델이라는 것입니다. 대학이 그런 에코시스템에 적극적으로 편입됐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