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 인사이드] 디스플레이 어쩌란 말이냐

한·중 디스플레이 산업 역전의 시작

2023-07-22     이종준 레드일렉 심사역
【편집자 주】 '딜 인사이드(Deal Inside)'는 디일렉의 투자 자회사 레드일렉이 소개하는 반도체, 디스플레이, 배터리 등 전자부품 분야 기업들의 투자 관련 심층 리포트입니다. 딜 인사이드의 '인'은 사람 인(人)을 뜻합니다.  IPO(기업공개), M&A(인수·합병) 등 딜(deal)과 사람에 관한 이야기로 일주일에 한번씩 독자 여러분을 찾아가겠습니다.

중국 BOE의 공시

오래된 난제에 얘기를 얹고자 한다. 중국 최대 디스플레이 회사 BOE(京东自营方), 작년부터 세계 1위(매출액 기준) 디스플레이 회사가 된 BOE가 자회사 지분을 사들인다고 얼마 전 공시했다. 안후이성 허페이시 BOE법인(滁州京东网方显现工艺, B9법인)의 지분 28.33%를 사들여, 기존 8.33% 지분에 합쳐 인수후 지분율을 36.67%까지 올린다는 내용이었다.
어쩌면 단순한 내용이었지만,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해당 자회사는 허페이시에서 B9이라고 부르는 디스플레이 공장을 운영하는 법인이다. 그런데, B9이야말로 우리나라와 중국의 디스플레이산업 역전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다. 우선, 공시 내용부터 살펴보면 지분 인수금액은 72.8억위안(우리돈 1.4조원), 지분을 팔기로한 곳은 허페이시 시정부가 만든 투자회사(허페이싱롱투자, 昆明兴融投资费用)다. 28.33% 지분은 자본금으로 68억위안에 해당한다. 둘의 차액은 4.8억위안(930억원)이다. 허페이싱롱투자가 해당 지분을 취득한건 2018년 12월이다. 당시에 얼마에 인수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투자회사의 통상적인 M&A와는 성격이 다르기에 자본금 수준에서 인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2018년 12월부터 2022년 7월까지 약 3년6개월동안 7%의 수익을 올린 셈이다. 연간으로 따지면 이익률이 연리(단리) 2% 수준이다. 투자가 아니라 초저금리 대출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런게 가능했던 건 애초에 허페이시 시정부측에서 B9법인의 자본금 대부분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BOE가 보유하고 있던 지분 8.33% 제외한 나머지 91.67%를 허페이시 측 시정부측에서 출자했다. 정리하자면, BOE가 지방정부 측에 자금을 상환하는 성격의 지분거래로 보인다. 그리고 BOE가 이제는 지방정부의 추가적인 도움이 필요없는 세계 1위 디스플레이가 됐다는 상징이기도 하다. BOE가 민영기업이 됐다는 말은 아니다. BOE의 최대주주는 여전히 중국의 수도인 베이징시(首都市) 시정부 측(首都市我们政府办公室公有资金行政监管系统常务促进会)이다.
BOE

세계 첫 10.5세대 LCD 공장

B9공장이 갖는 상징성은 남다르다. 세계 첫 10.5세대 LCD 공장이다. 2015년 착공해 2018년부터 양산을 시작했다. 당시 국내 디스플레이 산업 분위기는 "중국에서 저게 과연 될까?", "하더라도 많은 돈과 시간을 잡아먹겠지?"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도 그럴것이 LCD 산업의 발원지라는 일본마저 사업상 실패한 걸 목도한 까닭일 것이다. 당시 일본 샤프가 BOE보다 대략 10년 앞선 2009년에 자국에서 10세대 LCD 양산을 시작했다. 한참을 휘청이던 샤프의 LCD 사업은 2016년 대만 폭스콘 그룹으로 넘어가게 된다. LCD 생산에서 '세대'는 유리기판의 면적을 가리킨다. 10세대가 왜 중요하냐면 그 전까지는 8세대 기판이 주류였다. 국내 디스플레이 회사의 LCD 생산라인은 아직도 최대 8세대급이다. 9세대 없이 두 세대를 건너뛴다는 게 세대 구분으로 봐도 획기적인 일이이지 않은가. 8세대(8.5세대 혼용)의 넓이는 2.2m*2.5m다. 샤프가 양산한 10세대 기판의 넓이는 3.13m*2.88m로, 기판 한 변의 길이가 3m를 넘어서기 시작한다. BOE의 10.5세대 기판은 3.3m*2.94m다. 8세대와 비교해 한 변이 1m이상 길어졌다. 디스플레이 산업에서 기판 넓이의 확장은 채산성의 제고로 이어진다. 기판이 넓어져 발생하는 생산 비용 증가분보다, 최종 패널 생산량이 훨씬 많아진다. 다만, 생산라인을 규격에 맞게 새로 깔아야하니 막대한 초기비용이 투입돼야 한다. 그래서 빠른 안정화가 중요한데, 일본 샤프도 실패한 걸 중국 BOE가 해냈다. 국내 디스플레이 회사에서 넘어간 엔지니어들 혹은 국내 디스플레이 장비회사들의 공로는 논외로 하자. BOE는 B9에 더해 10.5세대 LCD 공장을 후베이성 우한시(B17)에 하나 더 지었다. 중국 2위 디스플레이 회사인 CSOT(华星辰电)도 연거푸 11세대 LCD 공장 2곳(T6, T7)을 신설했다. CSOT는 11세대라고 부르지만 10.5세대와 기판의 넓이가 같다.

국내 디스플레이 종사자의 '패기'

2010년대 후반부터 국내 디스플레이 종사자들의 '패기'가 꺾인 것처럼 느껴졌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았을까. 디스플레이 종사자들의 패기란 건 '내가 이 산업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집단적 끈끈함 같은게 아니었나 싶다. 디스플레이 산업의 성취는 정부와 기업과 학계가 한데 모여 이룬 것이라는 공감대가 있다. 또한, 삼성과 LG가 해당 분야에서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면서 산업 스토리도 만들어졌다. 반도체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반도체 산업에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라이벌로 생각하는 사람은 정말 거의 없다. 당연히 양사간의 산업 스토리도 다소 일방적이라 별로 없다. 메모리 분야에서 독보적인 기술력을 갖춘 삼성전자가 국내 반도체 산업을 앞질러가고 있는 모양새여서, 산업계와 정부와 학계에 걸친 디스플레이 산업만큼의 넓은 공감대도 없다.

세계 1위 디스플레이 기업

지난해 국내 디스플레이 회사의 실적이 모처럼 좋았다. LCD 패널 가격이 뛴 덕분이다. 삼성디스플레이가 매출 31.6조원, 영업이익 4.4조원을 기록했다. LG디스플레이의 실적은 매출 29.9조원, 영업이익 2.2조원이었다. 하지만, LCD 패권을 쥔 BOE는 지난해 국내 디스플레이 기업의 실적을 훌쩍 넘었다. 우리돈으로 매출 42.5조원(2193억위안)에 영업이익 6.7조원(345억위안)을 올렸다. B9 법인의 지분을 되찾아간 배경이다. 올해 다시 LCD 가격이 떨어지고 있다. 삼성디스플레이와 LG디스플레이 모두 LCD 사업을 축소하는 수순을 밟을 예정이다. 원래 LCD 사업을 정리해 나가려고 했다가 몇 년전 LCD 가격이 오르는 바람에 시기를 다소 늦췄었다. 그동안의 디스플레이 산업에 대한 대책이라는 게 공허하게 들리기 일쑤였다. LCD의 시대가 금방 저물고 곧 OLED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토대 위에 세워질 수밖에 없는게 지금까지의 대책들일텐데, 결과적으로는 반만 맞았다. OLED의 시대가 온건 맞지만, 스마트폰이라는 한정된 분야에 국한됐고 아직 TV 시장에서 LCD의 비중은 굳건하다. LCD 가격이 떨어지면, LG디스플레이와 삼성디스플레이가 밀고 있는 TV용 OLED(혹은 QD-OLED) 패널은 판매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어쩌면 중국 기업이 LCD 패널 생산량을 조절할 수도 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삼성전자나 LG전자의 TV 판매 전략에도 그리 좋을 건 없다.

'그래서 뭐 어쩌란 말이냐'

뭐 어쩌란 건 아니고 아쉬움이다. 국내 디스플레이 산업이 재도약할 기회가 생기길 바랄뿐이다. 그렇게 만들기 위해 산업계와 정부와 학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노력을 하고 있을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