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는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언제든 승부가 뒤집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올해 아시안 게임에서 백미는 한국과 일본이 맞붙은 축구 결승전이었다. 한국은 첫 골을 내주고도 2-1로 역전 드라마를 작성했다. 여운이 오래갔다.
사람 심리가 묘하다. 반전을 즐긴다. 특별히 응원하는 팀이 없으면 약자를 응원할 때가 많다. 일종의 측은지심(惻隱之力)인지 모르겠다.
힘겨웠던 올해 전자업계에도 반전이 절실했다. 한국경제의 엔진인 반도체가 언제 반등할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3분기 여전히 큰 폭의 적자를 냈다. 하지만 적자 폭이 줄면서 ‘턴 어라운드’라는 희망의 불씨를 살렸다. SK하이닉스가 전 분기보다 1조 넘게 적자를 줄였고, 삼성전자도 반도체에서 6000억원 남짓 줄였다. 하이닉스는 D램 분기 흑자까지 달성했다.
올해 눈길을 끈 현상은 ‘힘의 역전’이었다. SK하이닉스가 단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3분기 실적만 놓고 봐도 확연하게 드러난다. 1인자 삼성전자보다 먼저 D램 흑자전환을 이뤘다. 적자 감소 폭도 훨씬 컸다. 승부처는 고대역폭메모리(HBM) 였다. 생성형 AI 열풍으로 대박이 난 엔비디아에 하이닉스가 HBM을 독점 공급한 게 주효했다. 경쟁사보다 빠른 감산 결정도 빛을 발했다. 삼성전자와 하이닉스의 D램 시장점유율 격차는 1분기 18%포인트에서 2분기 7.2%포인트까지 좁혀졌다. 3분기에는 그 폭이 더 줄었을 것이다. 만년 2위가 선두를 위협하는 풍경이 낯설기도 하다. 삼성전자가 무서운 반격을 벼르고 있다. 공수가 뒤바뀐 D램 시장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흥미진진하다.
힘의 역전은 미국에서도 나타났다. AI 반도체 시장을 장악한 엔비디아는 ‘나홀로 질주’ 중이다. AI 가속기는 주문이 1년 가까이 밀려 있을 정도다. 시스템반도체 전통의 강호 인텔과 AMD가 ‘타도 엔비디아’를 외친다.
산업의 무게중심도 바뀌고 있다. 반도체 미세화 한계의 대안으로 어드밴스드 패키징이 떠오르면서 반도체 후공정이 전공정보다 주목받는 한해였다. TSMC는 칩렛, 팬아웃웨이퍼레벨패키징 등의 앞선 패키징 기술로 엔비디아, 애플 등 굵직한 파운드리 물량을 싹쓸이했다. 늘 서자 취급받던 후공정 엔지니어들의 몸값도 치솟고 있다.
배터리 시장에서도 리튬인산철(LFP) 배터리가 돌풍을 일으켰다. 중국산 저급 기술로 얕잡아봤지만, 가성비를 알아본 자동차 메이커의 주문이 쇄도했다. 삼원계 배터리만 고집하던 국내 배터리 3사가 자존심을 접고 부랴부랴 합류했다. 디스플레이 시장에선 모바일용 중소형 패널이 TV용 대형 패널을 제치고 주류로 확고히 자리매김했다.
아직 서막에 불과하다. 주류와 비주류의 자리바뀜은 AI, 모빌리티, 클라우드 등 신기술 혁명이 진전되면서 더욱 잦아질 것이다. 전기차로 대변되는 모빌리티 혁명은 배터리 전동화에 이어 지율주행으로 전선이 넓어진다. 내연기관차에서 주류였던 부품이나 소프트웨어 기업도 하루 아침에 마이너로 전락할 수 있다.
AI시대의 전망은 이미 10년 전부터 나왔다. 그러나 엔비디아, SK하이닉스, TSMC 등 소수 기업이 기회를 독점했다. 기회를 잡은 기업과 그렇지 못한 기업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기업마다 내년 사업계획 수립에 한창이다. 올해 벌어진 힘의 역전, 그 근원을 밝히는 게 핵심이다. 내년엔 또 누가 웃을까. 경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