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칼럼] 팹리스는 죄가 없다
파두發 마녀사냥 주의보
2023-11-15 장지영 발행인
미디어 효과 이론 가운데 의제설정(Agenda Setting) 이론이 있다. 언론이 자주 언급한 이슈나 인물에 대중도 똑같이 주목한다는 것이다. 미국 언론학자 맥스웰 맥콤스와 도널드 쇼가 1968년 선거 캠페인 기간 동안 미디어가 강조한 이슈를 유권자들도 중요하게 인식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면서 유래했다.
의제설정 이론은 후속 연구가 이어지면서 ‘2차 의제설정(Second Level Agenda Setting) 이론’으로 발전했다. 미디어가 특정 이슈나 인물을 특정 속성과 함께 자주 언급하면, 대중이 그 이슈와 인물을 떠올릴 때 그 속성까지 연상한다는 것이다. 가령 유명 연예인의 마약 보도가 이어지면 대중은 그 연예인을 언급하면 ‘범법자’와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도 함께 떠올린다는 것이다. 의제설정 이론은 미디어의 강력한 효과를 보여준다. 대중의 생각을 조정하는 숨은 권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되새기게 된다.
지난 일주일간 미디어가 주목한 이슈는 반도체 설계기업(팹리스) 파두의 ‘뻥튀기 상장’ 논란이었다. 올해 IPO 최대어로 지난 8월 상장한 파두는 2·3분기 충격적인 실적을 뒤늦게 공개했다. 분기 매출이 고작 5900만원과 3억2100만원에 불과했다. 올해 매출액 1203억원을 제시했던 비전이 공수표였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파문이 확산됐다. 주가는 일주일 새 반토막이 났다. ‘사기 IPO’라는 원성이 쏟아졌고 급기야 금융감독원이 사실 조사에 나섰다. 논란의 핵심은 5900만원짜리 2분기 매출을 숨긴 채 공모를 강행했느냐는 것이다. 회사는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2분기 실적 집계가 끝난 뒤 공모가 이뤄진 점 때문에 납득하는 이가 거의 없다.
한국 팹리스 첫 유니콘 기업으로 주목받던 파두의 몰락은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주인공 엄석대를 떠올리게 한다. 힘으로 급우들을 제압하고 시험지를 바꿔치기하는 등 각종 권모술수로 군림하던 반장 엄석대는 담임이 바뀌면서 ‘일그러진 영웅’의 실체가 드러난다. 엄석대의 군림에는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급우와 담임의 묵인이 있었다. 자신의 잇속을 위해서는 부정에도 눈감는 현대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파두의 ‘뻥튀기 상장’ 논란도 상장 주관사, 투자자, 애널리스트 등 이해관계자들이 묵인하거나 방조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으로 번졌다. 금감원 사실조사의 첫 타깃도 상장 주관사를 겨누고 있다.
문제는 파두 논란이 파두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팹리스 업계는 파두로 말미암아 팹리스 비즈니스 자체가 평가절하될 것을 걱정한다. 언론에서는 기술특례상장 제도의 허점이나 유니콘 기업 지원정책의 문제점까지 의제를 넓히고 있다. 파두에서 시작된 부정적 인식이 팹리스, 스타트업 전반으로 확대되는 ‘나비효과’가 나타날 조짐이다.
사실 팹리스 비즈니스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반도체 설계, 고객사 확보, 제품 양산까지 길게는 5년 이상 걸린다. 이 과정에서 살아남으려면 투자자들의 도움이 절실하다. 엔비디아, 퀄컴 등 세계를 호령하는 팹리스도 이런 데스밸리를 힘겹게 넘어왔다. 그런데 팹리스 기업에 ‘거짓’ ‘사기’ ‘뻥튀기’ 등의 부정적인 단어가 연상된다면 과연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의제설정 이론은 최근 미디어 보도가 대중의 행동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로 발전하고 있다. 비행기 사고 보도 이후 비행기표 판매가 감소하거나 대학교 살인사건 뉴스가 보도되자 신입생 지원자가 줄었다는 연구 등이 잇따라 발표됐다. 파두 사태 이후 팹리스 기업에 투자가 끊긴다면 우리가 그렇게 염원하던 ‘팹리스 강국’도 한낱 신기루에 그칠 것이다.
지금 언론이 경계해야 할 것은 특정 기업의 문제를 산업 전체로 확대 해석하는 것이다. 국내 팹리스 가운데 잠재력을 지닌 기업은 여전히 많다. 박봉에 야근을 밥 먹듯 하지만 ‘꿈이 있는 지옥’에서 묵묵히 일하는 엔지니어들도 부지기수다. 언젠가 ‘한국의 엔비디아’를 탄생시킬 주역들이다. 비뚤어진 뿔을 바로 잡으려다 소를 죽여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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