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칼럼] EU가 AI와 전기차를 규제하는 이유

‘냄비 속 개구리’ 한국 대책 있나

2023-12-20     장지영 발행인
‘제국의 역습’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유럽연합(EU)이 지난주 ‘AI 법(AI Act)’ 도입에 전격 합의했다. AI 기술 이용을 제한하고 위반 기업에 벌금을 부과하는 게 골자다. AI가 인류에 위협적인가를 놓고 논란이 뜨거운 가운데 EU가 세계 최초로 규제안을 내놓은 것이다. 규제안은 상당히 구체적이고 강력하다. AI 기술이 ‘시민 권리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가’를 기준으로 ▲허용불가(unacceptable) ▲고위험(high risk) ▲제한된 위험(limited risk) ▲저위험(low risk) 등 4개 등급으로 분류했다. 최고 위험등급을 받으면 아예 서비스를 못한다. AI로 안면 인식과 같은 생체정보를 무분별하게 수집하거나 성별, 인종, 종교 등의 기준으로 사람을 분류하는 건 금지된다. 자율주행차나 AI 의료장비는 ‘고위험 기술’로 분류돼 관련 데이터를 공개해야 한다. AI 열풍을 몰고 온 생성형 AI의 경우 ‘AI가 만들었음’과 같은 워터마크를 부착하도록 했다. 규정을 어기면 최대 3500만 유로(약 500억원)나 글로벌 매출의 7%를 벌금으로 내야 한다. 메가톤급 파장이 예상된다. 세계 경제의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떠오른 생성형 AI와 자율주행차 개발에 급제동을 걸 수 있기 때문이다. AI 가속기의 폭발적인 수요로 반등을 노리던 반도체 업계에도 큰 악재가 터진 셈이다. 뉴욕타임스는 “테크 기업뿐 아니라 금융, 교육, 의료 등에서 AI를 활용하는 모든 기업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전망했다. EU가 세계 경제 회복에 찬물을 끼얹는 규제법을 서둘러 만드는 속내가 궁금하다. 명분은 ‘AI 기술의 위협에 대비한다’이지만 산업이 막 이륙하려는 시점에 발목을 잡고 나서 의구심이 커진다. 일각에서는 AI 선도기업이 없는 유럽이 미국을 견제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분석을 내놓는다. 미국 기업이 주도하는 생성형 AI를 고위험 기술로 분류하고 규제의 타깃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있다.
EU는 전기차에서도 보호무역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중국산 전기차가 유럽 전기차 시장의 15%를 점유할 만큼 위협적인 존재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최근 중국 정부의 개발 보조금을 받은 중국산 전기차가 EU의 전기차 판매 보조금까지 받는 상황을 놓고 불공정 경쟁이라며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중국산 전기차에 관세를 부과하거나 보조금을 줄이는 방안이 거론된다. 당장 프랑스는 중국산 전기차를 막겠다며 원거리 배송 전기차에 보조금을 주지 않는 ‘프랑스판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제정했다. EU의 이런 움직임은 일종의 자위권 발동으로 볼 수 있다. 유럽중앙은행(ECB)은 올해 EU 경제성장률이 0.6%에 그칠 것으로 전망했다. 미국의 4.9%나 중국의 5.2% 전망치와 비교하면 턱없이 낮은 수치다. EU 경제 최강국 독일은 올 3분기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EU의 핵심산업인 자동차는 중국에 내줄 판이고, 미래 성장엔진인 AI는 미국에 선수를 뺏길 판이다. EU로서는 자국 기업이 시간을 벌고 경쟁력을 갖춘 뒤 해외 기업과 경쟁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중국은 이미 이 같은 봉쇄전략으로 미국의 테크기업으로부터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도 했다. 미·중 패권전쟁에 이어 이젠 EU 보호무역이라는 악재까지 불거졌다. 세계 각국이 철저하게 자국의 이익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그런데 한국 정부에는 뚜렷한 자국 보호정책이 보이지 않는다. 반대로 국내 플랫폼 기업을 ‘지배적 사업자’로 지정하고 우리 기업을 스스로 묶는 ‘자승자박법’까지 추진 중이다. 최태원 대한상의 회장은 지난 18일 새해 경기 전망을 주제로 한 기자간담회에서 내년엔 주요국의 자국 중심정책이 심화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각국은 공격적인 보조금과 인센티브 정책으로 투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상당히 노력하고 있다”며 “우리도 이에 상응하는 새로운 인센티브 등 보호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지난주 ‘세미콘 재팬’ 출장을 다녀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일본 반도체 산업이 부활하고 있다고 증언한다. 강력한 인센티브 정책으로 TSMC 등이 일본에 반도체 신공장을 지으면서 확실한 부양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가까운 일본마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우리만 ‘냄비 속 개구리’가 되는 건 아닌지 심히 걱정된다. 한국 정부가 최소한 위기감이라도 가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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