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칼럼] 삼성 반도체, ‘불타는 플랫폼’ 버려라

낡은 비즈니스 고수 땐 ‘2등의 반란’에 속수무책

2024-01-04     장지영 발행인
메모리 치킨게임의 시대는 끝났는가? 이번 반도체 불황기를 거치면서 가장 궁금해진 질문이다. 1년 전, 열에 아홉은 치킨게임에 이은 삼성전자의 점유율 확대를 예상했다. 경쟁사의 감산 발표에도 삼성은 “감산은 없다”고 단언했다. 치킨게임의 서막이 열렸다고 생각했다. 메모리 빙하기 때마다 전개된 시나리오가 그려졌다. 제조원가 경쟁력을 갖춘 삼성전자가 버티는 사이 경쟁사가 나가떨어지는 그림이었다. 그런데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경쟁사보다 영업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삼성은 뒤늦게 감산 대열에 합류했다. 사실상 항복 선언이었다. 치킨게임이 사라진 메모리 시장엔 ‘2등의 반란’이라는 생소한 광경이 펼쳐진다. SK하이닉스는 지난해 3분기 삼성전자보다 먼저 D램 흑자전환을 실현했다. 4분기 실적은 아직 발표되지 않았지만, 하이닉스의 영업이익이 삼성을 압도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하이닉스만 분기 흑자를 기록할 것이라는 분석까지 나왔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젠슨 황 엔비디아 대표는 지난해 3월 AI 개발자 콘퍼런스 ‘GTC 2023’에서 “인공지능(AI)의 ‘아이폰 모먼트’가 시작됐다”고 선언했다. 지금 메모리 시장 질서의 균열은 그 발언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체감하듯 ‘아이폰 모먼트’와 같은 ‘AI 모먼트’가 펼쳐지고 있다. ‘아이폰 모먼트’는 2010년에서 2020년 사이 휴대폰 시장의 지각변동, 빅테크의 등장과 성장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말한다. 시발점이자 가장 극적인 장면은 휴대폰 제국 ‘노키아의 침몰’이었다. 노키아 CEO마저 “불타는 플랫폼에서 뛰어내려야 한다”고 한탄했다.
기시감이 든다. 아이폰 모먼트로 몰락한 노키아의 자리를 ‘만년 2등 삼성전자 휴대폰 사업부’가 꿰찼다. 당시에도 ‘2등의 반란’이라는 헤드라인이 신문 지면을 장식했다. ‘아이폰 모먼트’와 ‘AI 모먼트’의 단어에 ‘노키아 휴대폰’과 ‘삼성전자 반도체’라는 단어가 연상되는 건 기우일까. 신기술은 산업 지형을 바꾼다. 최근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에서 SK하이닉스의 질주와 삼성전자의 고전은 전조처럼 보인다. 아이폰이 그랬듯이 AI는 기존의 ‘비즈니스 문법’을 바꾸고 있다. 범용 메모리 시대가 저물고 HBM처럼 주문형 메모리가 급부상한다. 1등 기업의 전매특허 전략인 ‘치킨게임’의 약발이 떨어진 것도 이런 변화 때문이다. 주문형 메모리 시장에선 SK하이닉스가 확실히 주도권을 잡은 것 같다. 지난해 엔비디아에 HBM3를 독점 공급한 데 이어 차세대 HBM3e 공급도 가장 먼저 확정지었다. 애플이 출시를 앞둔 혼합현실(XR) 기기 ‘비전프로’의 저전력 메모리도 SK하이닉스가 공급한다. 마이크로소프트, 테슬라 등 빅테크도 자체 AI 가속기에 들어갈 주문형 메모리 개발을 위해 제일 먼저 SK하이닉스를 찾는다. 1등이 2등에게 밀린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1등 신화에 도취한 자부심과 경직된 비즈니스 문화를 꼽을 수 있다. 연간 매출 100조원에 육박하는 삼성전자 반도체(DS) 부문은 조 단위가 넘지 않는 사업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D램과 낸드플래시 범용 메모리 시장을 석권하면서 고객사를 마주할 때도 ‘슈퍼 을’의 지위를 누리곤 했다. 반면에 2등 기업 SK하이닉스는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틈새시장을 타진했다. 닌텐도의 요구로 2013년 처음 개발한 HBM도 그렇게 탄생했다. 일각에선 향후 5년내 주문형 메모리 시장 비중이 40%를 넘을 것으로 본다. 전기 소모가 많은 AI 시스템의 운영비를 줄이려면 앞으로 자신의 시스템에 최적화된 메모리를 찾는 수요가 크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주문형 메모리는 파운드리(위탁생산) 비즈니스와 유사하다. 끊임없이 고객사와 소통하면서 공동 개발하는 유연성이 성공의 열쇠다. ‘삼성 반도체 웨이(Way)’를 고수해온 그간의 경직된 비즈니스 문화로는 한계가 명확하다. 시간을 거슬러 2009년. 당시 삼성전자 무선사업부장을 맡은 신종균 사장은 국내 휴대폰 소프트웨어 기업 CEO들과 거의 매일 대책 회의를 했다. ‘아이폰 쇼크’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피처폰 2등 기업은 생존이 발등의 불이었다. 당시 이례적인 광경은 이 회의에 경쟁업체 협력사까지 모두 불렀다는 점이다. 경쟁사 협력업체와는 교류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깼다. 그때 회의에 참석했던 CEO들은 ‘슈퍼 갑’으로 군림하던 삼성이 SW기업을 드디어 동반자로 대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고 증언한다. 이런 유연성 덕분에 삼성은 노키아의 몰락과 반대로 세계 1위 휴대폰 기업 반열에 올랐다. ‘AI 모먼트’는 ‘아이폰 모먼트’처럼 향후 10년간 지속될 공산이 크다. 과거 삼성 무선사업부처럼 현재 반도체(DS) 부문도 골든타임을 놓쳐서는 안 된다. 범용 메모리 시대의 성공 비즈니스 공식을 깨는 자기 부정이 첫걸음이다. 노키아의 길을 가지 않으려면 ‘불타는 플랫폼’을 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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