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키옥시아 지분 인수에 4조원 투자한 SK하이닉스도 변수
실질적으로 상당량의 키옥시아 지분 확보해 영향력 행사 가능
WD-키옥시아 합병시 가장 영향받는 기업이란 점에서 반대할 듯
2023년 연초부터 메모리반도체 업계 재편 가능성이 나오고 있다. 낸드플래시 세계 2위 업체인 일본 키옥시아와 4위 미국 웨스턴디지털(이하 WD)이 합병 협상을 재개했다는 소식이 초미의 관심사다. 합병이 성사될 경우 단숨에 낸드플래시 시장 1위에 오르게 된다는 점에서, 업계는 촉각을 곤두세우는 분위기다.
키옥시아-WD 합병 성사 여부와 관련해 업계에선 SK하이닉스의 '역할'에 주목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키옥시아 주주는 아니지만, 키옥시아의 주요 주주인 글로벌 사모펀드의 핵심 투자자다. 합병 추진 과정에서 SK하이닉스가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할 수도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게 업계 중론이다.
25일 업계에 따르면 로이터는 최근 키옥시아와 WD 합병 재추진과 관련해 보다 구체적인 내용이 오가고 있다고 보도했다. WD 낸드 사업부문만 분사해 키옥시아와 합병하고 이를 미국 내 신규상장하거나 일본에 교차상장하는 방식이 유력하다는 내용이다.
만약 합병이 성사되면 그야말로 낸드플래시 시장 지각 변동이 일어나게 된다. 두 회사가 합병하면 현재 시장 점유율 1위인 삼성전자를 제치고 1위 업체가 된다. 솔리다임을 포함한 SK하이닉스의 낸드 시장 점유율보다도 2배 가량 높은 시장 지배력을 갖추게 된다.
현재로선 실제 합병 성사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게 전문가들의 관측이다. 당장 관심이 쏠리는 대목은 SK하이닉스의 의중이다.
SK하이닉스는 지난 2018년 일본 도시바의 메모리사업부(현 키옥시아) 매각 과정에 참여하며 실질적으로 상당 수준의 키옥시아 지분을 확보할 수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 SK하이닉스는 도시바 메모리사업부 인수를 추진한 한미일 컨소시엄에 4조원가량을 투자했다. 다만 전환사채와 펀드 출자 형식이어서 직접적인 지분을 보유하고 있진 않다.
키옥시아가 최근 발표한 경영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키옥시아 최대 주주는 도시바로 약 40.6% 지분을 갖고 있다. 일본 호야가 3.1% 지분을 갖고 있어 일본 기업의 지분은 대략 43.7%다.
나머지 56.3% 지분은 베인캐피털이 주도한 한·미·일 컨소시엄이 갖고 있다. 키옥시아 경영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베인캐피털은 총 4가지 형태로 키옥시아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보고서 그대로 영문 표현으로 보면 BCPE Pangea Cayman, L.P(25.9%), BCPE Pangea Cayman2, Ltd(15%), BCPE Pangea Cayman 1A, L.P(9.4%), BCPE Pangea Cayman 1B, L.P(6%) 등이다.
SK하이닉스는 2018년 베인캐피털 주도 컨소시엄에 4조원 가량 투자했다고 밝힌 바 있다. SK하이닉스가 공시한 지난해 반기보고서의 타회사 지분 보유 현황을 보면 BCPE Pangea Cayman, L.P와 BCPE Pangea Cayman2, Ltd를 보유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BCPE Pangea Cayman, L.P 지분 74%를 확보하고 있다고 공시됐으며 BCPE Pangea Cayman2, Ltd 지분률은 0%로 표시됐다. 다만 BCPE Pangea Cayman2, Ltd 장부가액은 약 2조3000억원으로 표시됐다.
구체적으로 SK하이닉스가 도시바 투자를 확정할 때 지분 구조를 살펴보면 SK하이닉스가 약 1조3000억원 규모로 전환사채에 투자한 부분이 키옥시아가 IPO를 한 뒤 주식으로 전환될 수 있다. 그럼 SK하이닉스가 확보하게 되는 지분은 약 15% 수준으로 추정된다. 향후 합병 추진 과정에서 적잖은 변수가 되기에 충분하다. 반도체 업계가 WD-키옥시아 합병 과정에서 SK하이닉스가 ‘캐스팅보트’가 될 수 있다고 보는 이유다.
키옥시아와 WD 합병이 성사되면 역설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받을 기업은 SK하이닉스가 될 가능성이 높다. 시장조사업체 옴디아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낸드플래시 시장에서 삼성전자가 31.6% 점유율로 1위를 차지했다. 키옥시아(21.1%)와 SK하이닉스(19.0%, 솔리다임 포함)이 뒤를 잇는 가운데 WD(12.4%)와 마이크론(11.8%)가 5위권을 형성한다. 키옥시아와 WD 합병이 이뤄지면 3분기 기준 점유율이 33.5%로 단숨에 삼성전자를 제치고 1위로 올라선다. WD와 키옥시아 합병이 성사되면 현재 2~3위권인 SK하이닉스는 솔리다임 인수에도 불구하고 후발주자로 처질 가능성이 있다.
결국 이 같은 시장 구조 때문에 현재 적잖은 키옥시아 지분을 확보하고 있는 SK하이닉스가 키옥시아와 WD 합병을 암묵적으로 반대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업계 중론이다. 이 때문에 연초 CES 2023에서 박정호 SK하이닉스 부회장도 키옥시아와 WD 합병 추진에 대해 “쉽지 않을 것”이라며 “일본 정부 역시 두 회사 합병을 쉽게 허용해주진 않을 것으로 판단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박 부회장은 “우리가 가진 키옥시아 지분을 보통주로 전환하면 지분 약 40%를 보유한 주주가 될 수 있다”며 “SK하이닉스가 한 투자에 대해 일본 정부가 어떤 자세를 보일지가 관전포인트”라고 했다.
SK하이닉스가 아니더라도 더 큰 변수가 있다. 각국의 승인절차를 통과하기가 쉽지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최근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대규모 M&A는 사실상 성사되지 못하고 있다. 자국 반도체 산업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각국이 글로벌 반도체 기업간 M&A에 제동을 걸고 있어서다. 지난해 엔비디아의 ARM 인수가 무산된 게 대표적이다. 대만 글로벌웨이퍼스가 실트로닉스를 인수하려던 계획도 무산됐다.
게다가 현재까지 알려진 합병 추진방식은 WD가 키옥시아를 인수하는 형태다. 양사간 구체적인 논의내용이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외신은 "(합병이 되면) WD 경영진이 합병회사 경영을 맡을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때문에 일본 정부 입장에서 사실상 마지막 메모리반도체 기업인 키옥시아를 미국 기업에 매각하는 것이 달갑지만 않은 일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결국 캐스팅보트 SK하이닉스의 지분, 일본 산업계 입장, 각 국가의 승인 여부 등을 감안하면 WD와 키옥시아 합병은 2년 전과 마찬가지로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디일렉=강승태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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