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 수요조사 목록서 특정업체 툴 비중 75% 이상 편중
디자인하우스 업계에는 수요조사 조차 안 해
문재인 대통령의 국가 시스템반도체 육성 전략 중 하나로 추진되고 있는 수십억원 규모 반도체 전자설계자동화툴(EDA:Electronic Design Automation) 지원 사업이 시작 전부터 불공정 수요조사 논란에 휩싸였다.
수요조사를 맡은 정부 출연 연구기관이 특정 업체를 ‘밀어준다’는 주장이 나오면서부터다. 팹리스와 함께 반도체 설계업의 한축을 맡고 있는 디자인하우스 업계를 대상으로는 수요조사조차 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디자인하우스 업계는 뒤늦게 이 사실을 파악하고 공동대응에 나설 태세다. 정부 예산이 투입되는 지원 사업에서 배제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15일 본지가 단독 입수한 수요조사 문건에 따르면 EDA 툴 수요 체크 항목에서 시높시스 툴이 전체 50개 가운데 38개에 달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75%에 해당하는 양이다. 지멘스멘토비즈니스는 8개, 케이던스 툴은 4개에 그쳤다. 수요조사는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SW-SoC융합R&BD센터가 맡았다. 국내 팹리스 반도체 업계에 이 같은 수요조사 문건이 지난 6월 발송됐다.
업계 관계자는 “경쟁사의 경쟁 제품이 있음에도 불구, 특정업체 툴 대부분만 수요조사 목록에 올려서 필요 여부를 체크하게 했다”면서 “목록에 없는 회사 툴이 선택될 여지가 적다”고 말했다.
ETRI 측은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주유상 ETRI SW-SoC융합R&BD센터 산업기술실장은 “많이 사용하는 툴 위주로 목록을 작성한 것”이라면서 “‘추가 필요 설계툴’이라는 항목에 목록에 없는 툴을 직접 적어서 낼 수 있게 했기 때문에 공정하지 않다는 일각의 주장은 맞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논란거리는 계속 나타나고 있다. ETRI는 수요조사 실시 안내 메일에서 “DC회원제는 1~13번, P&R회원제는 14~16번을 모두 체크해주셔야 합니다(모두 시높시스 툴)”라는 문구를 넣었다. 이는 시높시스 툴 체크를 유도하는 듯 한 뉘앙스라는 것이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ETRI SW-SoC융합R&BD센터가 수요조사 문건에 툴 공급사를 표시하지 않은 점에 대해서도 뒷말이 무성하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문 대통령의 시스템반도체 육성 의지를 반영해 46억원을 추경 편성, 설계 업계가 EDA 툴을 공동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할 예정이다. 이를 위한 수요 조사를 ETRI가 맡았다. 또 다른 업계 한 관계자는 “EDA 툴은 종류도 많고 이름도 어렵기 때문에 과기정통부 공무원이나 국회에서 최종 수요조사 결과만 봐서는 그 과정이 공정하게 이뤄진 것인지 알기 어렵다”고 말했다.
디자인하우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시스템반도체 설계 분야의 한 축을 맡고 있는 디자인하우스 업계를 대상으로는 수요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면서 “국가 세금으로 이뤄지는 지원 사업을 이렇게 편향적으로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말했다.
EDA는 반도체를 설계할 때 반드시 필요한 소프트웨어다. 초기 도입비가 비싸다. 2016년에는 다량의 설계 업체가 EDA 툴을 불법복제해 사용하다 적발된 사례가 있다. 정부가 반도체 설계 산업 육성을 위해 EDA 툴을 지원하겠다고 발표한 배경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4월 ‘시스템반도체 비전 선포식’에서 국내 팹리스 산업의 글로벌 시장 점유율을 2030년까지 10%로 확대하는 등의 비전을 발표하면서 △국내 팹리스의 수요 창출과 성장 단계별 지원 강화 △팹리스와 파운드리의 동반성장 생태계 조성 △민관 합동의 대규모 인력양성과 차세대 반도체 기술 확보 등의 전략을 제시했다. 46억원 규모의 EDA 지원 사업 관련 추경 편성안도 이 때 처음 나왔다.
세계 EDA 시장은 시높시스, 케이던스, 멘토그래픽스 3개 업체가 전체 시장점유율 98%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