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가 반도체 핵심 소재의 대 한국 수출을 규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대기업이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1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구매팀 관계자는 이날 일본으로 날아가 재료 공급업체를 방문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자리에서 삼성과 SK는 수출 규제가 이뤄지기 전까지 최대한 물량을 앞당겨서 받겠다는 의사를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수출 규제가 시행될 것으로 예상되는 이달 4일 전까지 필요한 물량을 최대한 가지고 와 시간을 벌겠다는 것이 국내 기업의 생각”이라면서 “삼성전자의 경우 국내에서 창고를 운영하고 있어서 어느 정도 여유가 있지만 필요할 때마다 그때그때 사 오는 SK하이닉스는 물량을 확보하지 못하면 공장 가동을 중단해야 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이 규제가 장기화되면 중국이나 미국, 기타 유럽 지역에서 원료를 가공해 우회해서 수입하는 방안도 있다”면서 “그러나 이 경우 재료비 상승은 피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핵심 소재 수출 규제 사실을 최초 보도한 산케이에 따르면 일본은 첨단재료 수출 허가신청이 면제되는 화이트(백색) 국가 대상에서 한국을 제외하기로 했다. 이렇게 되면 일본 재료 업계는 해당 품목을 한국에 수출할 때마다 건별로 당국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일본은 한국을 우호국으로 인정해 2004년 한국을 백색 국가로 지정했다. 현재 미국과 영국 등 27개국이 지정돼있다.
일본은 다음 달 1일부터 한 달 동안 각계 의견을 수렴한 뒤 8월 1일부터 새 제도를 운용할 방침이다. 이에 앞서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디스플레이에 쓰이는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포토레지스트(감광액), 식각 원료(고순도 불화수소) 등 한국 반도체 디스플레이 산업에 꼭 필요한 3개 품목에 대해서는 7월부터 규제를 시행하기로 했다. 해당 3개 품목은 다음 달 4일부터 계약별로 수출 허가를 받아야 하며, 허가신청과 심사에는 약 90일이 소요되는 것으로 전해졌다.
식각 재료는 3D 낸드플래시 등을 생산할 때 꼭 필요하다. 현재 솔브레인과 이엔에프 등이 식각 재료를 공급하고 있으나 이들은 각각 일본 스텔라케미파, 모리타로부터 식각 재료 원료를 가지고오기 때문에 단기로 타격이 불가피하다.
포토레지스트의 경우 첨단 공정에서 사용되는 재료는 대부분 일본에서 수입한다. JSR, TOK, 신에츠 등이 주요 공급업체다. 업계 관계자는 “그나마 식각 재료는 국내에서 30% 정도 자급이 가능하지만 첨단 포토레지스트의 경우 대부분 일본에서 수입해오는 것이어서 문제 심각성이 크다”고 말했다.
한편 이번 사태가 장기적으로 메모리 시황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김양재 KTB투자증권 연구원은 “일본의 수출 규제 시도가 현실화한다면 국내 반도체·디스플레이 제조사들은 단기적으로 생산 차질을 겪을 수도 있겠지만 중장기적으로는 수혜를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 연구원은 “현재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는 공급 과잉 국면에 놓여 있기 때문에 제조사들은 이번 이슈를 계기로 과잉 재고를 소진하는 한편 규제로 말미암아 발생한 생산 차질을 빌미로 향후 일본 업체에 대한 가격 협상력도 강화할 수 있을 것”고 설명했다.
1일 주식시장에선 일부 포토레지스트와 식각액을 공급하는 국내 기업인 동진쎄미켐, 솔브레인, 이엔에프, 램테크놀러지, 후성 등의 업체 주가가 급등했다. 단기로는 원료 조달에 타격을 받겠지만 ‘귀한 물건’이 되는 만큼 장기로는 긍정적이라는 기대감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