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수거사(一水去士)’라는 조어가 있다. 무협지에 나올 법한 인물인데, 풀어쓰면 기지가 번뜩인다. 말 그대도 ‘한물간 사람’이다. 2013년 ‘청빈의 대명사’ 조무제 전 대법관이 은퇴 후 스스로 ‘일수거사’라고 불러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일수거사의 귀환’이 요즘 화제다. 전영현 삼성SDI 이사회 의장이 삼성전자 미래사업기획단장으로 발탁됐고, 이석희 SK하이닉스 전 대표는 SK온 최고경영자(CEO)로 돌아왔다. 앞서 LX그룹 인사에서는 이윤태 삼성전기 전 대표가 LX세미콘 대표로 선임됐다. 한때 스타 CEO였지만, 일선에서 후퇴했던 이들이다. 이들의 복귀 소식에 ‘꺼진 불도 다시 보자’라는 뼈있는 농담마저 회자된다.
‘구관이 명관’이라고, 이들을 불러온 키워드는 ‘위기’다. 삼성전자에는 반도체와 휴대폰을 이을 미래 사업이 여전히 불투명하다. 올해 실적 저조로 ‘미래 대안 부재론’이 부각됐다. 짧은 시간에 덩치를 키운 SK온은 질적 도약이 발등의 불로 떨어졌다. 신공장 수율 제고, 만성 적자 탈출 등이 과제로 떠올랐다. 국내 1위 팹리스인 LX세미콘 역시 신규 사업 발굴과 매출처 다변화가 시급하다. 특히 거래를 튼 삼성과 우호적인 관계를 확대하는 게 관건이다. 세대교체 바람 속에서도 굳이 ‘올드보이’를 다시 호명한 이유도 그만큼 상황이 절박하기 때문이다.
의외의 인사이지만, 이들의 면면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많다. 전영현 부회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반도체와 배터리 전문가다. 워낙 기술과 시장에 대해 깊이 파고드는 스타일이라서 테크놀러지 기반의 비전 수립의 적임자로 꼽힌다. 이석희 대표는 지난 2021년 사상 최대 실적을 올리며 SK하이닉스 전성기를 이끌었다. 이윤태 대표 역시 적층세라믹콘덴서(MLCC)를 삼성전기의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키운 주역이다.
그렇다고 과거의 성공이 미래의 성공까지 보장하지 않는다. 벤처 신화를 썼던 많은 스타 CEO들이 재도전에 나섰지만 대부분 고배를 마셨다.
롤 모델이 없는 건 아니다. 애플에서 쫓겨났던 스티브 잡스는 복귀 후 ‘혁신의 아이콘’이 됐다. 덕분에 애플은 미국 시총 1위 기업으로 올라섰다. 은퇴 후 복귀한 밥 아이거 월트디즈니 회장은 1년 만에 순이익을 60%나 늘렸다. ‘디즈니 왕국의 부활’에 시동이 걸렸다는 평가도 나온다.
돌아온 일수거사는 강점이 많다. 무엇보다 오랜 시행착오 끝에 얻은 암묵지는 대체 불가 영역이다. 후배들이 흉내 낼 수 없다. 산전수전 다 겪어본 관록으로 위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경계해야 할 점은 ‘과거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다. 늙은이는 과거에 살고 젊은이는 미래에 산다는 말이 있다. 나이가 들수록 과거 성공 공식에 연연할 공산이 크다. 시시각각 빛의 속도로 변하는 테크 시장에선 독이 될 수 있다. 유연한 사고가 필요하다. 애 늙은이가 있고, 늙은 청년도 있듯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그때는 틀리고, 이젠 맞을 수 있다’는 자세로 임해야 한다.
일수거사의 컴백은 이미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고령화 사회에 진입하면서 ‘평생 직장’ 시대는 끝났다. 장강의 앞물결이 뒷물결에 밀리듯 승진 인사 이면엔 옷을 벗은 사람도 많다. 해가 바뀌면 취업제한 연한이 풀려 인생 2라운드에 도전하는 대기업 고문도 쏟아져 나온다.
돌아온 3인방은 이들을 대표한다. 그들의 성공이 사회 분위기를 많이 바꿔놓을 것이다. ‘나이’보다 ‘능력’ 중심의 선진 일자리 시스템을 앞당길 수 있다. 그래야 대한민국도 업그레이드된다. 일수거사들의 ‘슈퍼 울트라 필살기’를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