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드라마 작가에게 들은 이야기다. 시나리오에는 성공 공식이 있다. 먼저 주인공을 연민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다. 찢어지게 가난하거나, 장애를 갖고 태어나거나,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거나, 갑작스러운 사고로 나락으로 떨어지거나. 악당에게 갖은 핍박을 받거나. 온갖 역경과 시련으로 몰아넣어야 한다. 최대한 주인공이 불행해질수록 좋다. 시청자가 안타까워할 때까지.
다음 단계는 예상대로 반전이다. 성공 스토리가 시작된다. 출세하거나 악당에게 복수하거나 하는 식이다. 주인공에 대한 연민이 깊을수록 시청자의 ‘카타르시스’는 커진다.
삼성과 LG그룹 사장단 인사가 끝났다. 안정 속 변화를 꾀했다는 평가가 많다. 이 가운데 가장 관심을 끈 곳은 LG디스플레이(LGD)다. 정철동 LG이노텍 사장이 구원투수로 투입됐다.
LGD는 연민이 가는 회사다. 6개 분기 연속적자를 기록했다. 지난해 2조원대 적자를 냈고, 올해도 3분기까지 영업손실이 2조6000억원에 달했다. 야심차게 치고 나간 대형 OLED 라인은 가동률이 50% 밑으로 떨어졌다. 반전 카드로 준비한 아이폰용 OLED도 수율 문제로 점유율을 크게 늘리지 못했다. LCD는 가격하락으로 팔아도 밑지는 장사다. 사람으로 치면 전신의 혈맥이 막혀 곳곳에 혹이 불거진 시한부 환자 같다. 한때 세계 1위로 위엄을 떨치던 찬란한 시절과 대비돼 더욱 처량하다.
그래서 정철동 사장의 컴백은 반전 드라마의 기대감을 키운다. 정 사장에게 LGD는 친정과 같은 곳이다. LG반도체로 입사했지만, LGD에서 생산기술센터장 상무, 생산기술센터장 전무, 최고생산책임자(CPO) 부사장 등을 역임했다. 업계에서는 ‘디스플레이 생산기술의 달인’으로 불리곤 했다. 이른바 ‘크리스탈 사이클’에 따라 LGD의 영광과 쓴맛을 모두 경험했다. 이 때문에 정 사장의 복귀 소식에 경쟁사가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그는 LG이노텍에서 5년간 매출을 두 배로 키웠다. 전략 고객인 애플과 굵직굵직한 비즈니스도 성사시켰다. 애플과 거래 확대가 절실한 LGD로서는 천군만마를 얻는 것과 다름없다.
하지만 비즈니스는 현실이다. 드라마와 다르다. 당장 내년 디스플레이 시장전망도 밝지 않다. TV와 스마트폰 판매 부진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시장조사업체 DSCC에 따르면 내년 대형 OLED 공장가동률은 66%, LCD 가동률은 80% 수준에 그칠 전망이다. 올해보다 소폭 상승하지만 여전히 낮다,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게 쉽지 않다.
LGD의 지속가능성도 불투명하다. 눈덩이 적자로 투자 여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경쟁사인 삼성디스플레이가 차세대 IT용 OLED 생산공장에 투자한 것과 대비된다. 후발주자인 중국 BOE도 조만간 IT용 OLED 라인 투자에 나설 것으로 알려졌다. 미래 투자에 실기해 영원한 마이너로 전락할 수 있다.
그래도 이런 반전 드라마를 상상해본다. ‘생산의 달인’이 먼저 생산효율을 극대화한다. 수율을 업계 최대치로 끌어올리고, 생산라인 구조조정을 통해 불필요한 비용을 걷어낸다(이미 경쟁사는 이렇게 큰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다음으로 틈새시장으로 공략해온 차량용 디스플레이 판매량을 폭발적으로 늘린다. 공장가동률도 덩달아 올라간다. 생산 비용이 줄고, 신규 매출이 늘어나면서 재무제표는 빨간색에서 검은색으로 바뀐다. 숫자가 좋아지면서 투자자를 설득할 명분도 생긴다. 늦었지만 차세대 투자에 속도를 낸다. IT와 혼합현실(XR)용 디스플레이 시장을 개척한다. 때마침 TV 경기가 살아나 천덕꾸러기 대형 OLED 공장이 ‘황금라인’으로 바뀐다. 마침내 LGD가 세계 정상에 복귀한다. 한국 디스플레이 산업도 중국에 내준 왕좌를 되찾는다.
상상만으로도 행복한 ‘디스플레이판 성공 드라마’가 시작될까. ‘구원투수’ 정철동의 첫 투구에 눈과 귀가 쏠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