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해서 실패하라. 그것이 성공에 이르는 길이다.”
영국 가전기업 다이슨을 창업한 제임스 다이슨의 말이다. 그는 실패의 달인이다. 무선 진공청소기를 내놓기까지 5년간 5127개의 모형을 만들었다. 5127번 실패했다. 그렇게 탄생한 청소기는 글로벌 히트 상품이 됐다. 날개 없는 선풍기, 구멍 뚫린 드라이기 등도 숱한 실패 속에서 탄생한 역작들이다.
서울대 공대 교수들이 펴낸 저서 ‘축적의 시간’에서 강조하는 것도 실패다. 실패를 거듭하면서 암묵지가 축적된다. 암묵지는 시행착오를 거쳐 터득하는 경험적 지식이다. 책이나 매뉴얼에서 얻을 수 있는 ‘형식지’와는 차원이 다르다. 오로지 실패한 자만이 터득할 수 있는 독보적인 지식이다.
세계 1등 제품은 하나같이 실패를 축적한 결과물이다. 스페이스X의 '재활용 로켓'이나 ASML의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도 마찬가지다. 개발에 20년 넘는 시간이 걸렸다. 천문학적인 연구비로 회사가 망하기 직전까지 내몰리기도 했다. 그러나 무수한 실패 끝에 탄생한 혁신 제품은 누구도 범접하기 힘든 독점시장을 창출했다.
한국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업계에도 '실패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그간 미국, 일본 기업이 독점해온 곳에서 도전이 한창이다. 그 가운데 세간의 관심을 모은 아이템은 ‘EUV 펠리클’과 ‘OLED 증착용 파인메탈마스크(FMM)’다. 해외 기업도 고전하는 시장이라 상용화 추진 기업에 시장이 열광했다.
EUV 펠리클은 고가의 EUV 포토마스크를 보호하는 부품이다. EUV는 빛이 잘 흡수돼 투과도가 높은 펠리클을 개발하는 게 관건이다. 에프에스티, 에스엔에스텍 등이 양산 제품 개발에 총력을 쏟고 있다. 양산에 성공하면 삼성전자, TSMC, 인텔 등 굴지의 반도체 기업에 공급할 수 있다.
OLED용 FMM은 디스플레이 유기물 화소를 증착할 때 필요한 섬세한 그물망 같은 금속 부품이다. 그간 일본 DNP가 10년 이상 독점해온 품목이다. 풍원정밀, APS 등이 국책 연구과제를 기반으로 개발 중이다.
이들 제품은 1년 전부터 상용화가 임박했다는 소식으로 한껏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양산 일정이 계속 밀리고 있다. 수율과 성능이 기준치를 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EUV 펠리클은 얇게 만들어 투과도를 높이면 내구성이 약해지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FMM은 핵심 금속 소재인 인바(Invar) 확보와 낮은 수율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숱한 도전과 실패가 이어지고 있다. EUV 펠리클의 경우 탄소나노튜브(CNT) 다공성 구조라는 새로운 제품도 개발하고 있다. 투과도를 95%까지 높이고 내구성도 확보할 수 있는 개념이다. 하지만 CNT 입자의 오염을 막기 위한 코팅이라는 어려운 기술적 난관에 직면해 있다.
FMM의 경우 새로운 인바 개발까지 시도하고 있다. 수율 확보를 위한 수많은 레시피를 실험하고 있다. 수율 문제를 잡기 위해 A부터 Z까지 모든 경우의 수를 검토할 정도라고 한다.
그럼에도 시장의 관심은 예전만 못하다. 실패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과연 상용화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나온다.
그런데 최근 ‘롤 모델’이 나왔다. 선익시스템이 중국 BOE 8.6세대 OLED 라인증착장비 공급사로 선정됐다. 일본 캐논도키가 독점해온 시장을 마침내 뚫었다. 증착장비는 OLED 공정 핵심 장비지만 기술 난도가 높아 여러 한국 기업이 도전했지만 실패했던 분야다. 선익시스템도 BOE 공급까지 20여년이 걸렸다. 숱한 실패를 겪으며 최대 주주가 바뀌는 우여곡절도 있었다. 중요한 것은 도전을 멈추지 않은 것이다.
펠리클과 FMM 기업들도 상황이 비슷하다. 실패를 거듭하면서 이제 9부 능선을 넘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올해 하반기에는 양산하겠다는 기업도 속속 나오고 있다.
다이슨은 “실패는 발견에 한 발짝씩 다가가는 과정이므로 성공만큼 값지다”고 말했다. 실패에 이골이 난 펠리클과 FMM 개발 기업을 다시 응원해야 하는 이유다.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둡기 마련이다. 힘내라! 펠리클과 FMM 기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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