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은 유익한가, 해로운가.
AI가 뜨면서 ‘안전한 AI’에 대한 논쟁도 뜨겁다. 유럽연합(EU)은 처음으로 ‘AI 규제법’을 승인했다. 이런 분위기와 달리 미국 의회에서 최근 내놓은 ‘인공지능(AI) 규제 보고서’는 당초 예상을 빗나갔다. AI가 불러올 역기능보다 경쟁국(중국)에 AI 경쟁력을 뺏기는 상황이 더 위험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당초 규제 논의로 시작한 담론이 산업 육성으로 180도 바뀌었다. 규제는커녕 정부가 매년 최소 329억달러를 AI에 투자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담았다. 미 의회는 이 보고서를 기반으로 올해 말까지 AI 관련법을 제정한다. 보고서대로 되면 천문학적인 돈이 AI에 투입된다.
'규제'에서 '육성'으로 프레임의 전환이 극적이다. 그런데 어디서 본 듯한 장면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원자폭탄 개발 과정과 흡사하다. 미국은 원자폭탄의 무자비한 살상력을 우려하면서도 적국인 독일이 먼저 개발하는 것을 더 두려워했다. 현재 가치로 약 40조원에 달하는 예산을 쏟아부었다. 이른바 ‘맨하탄 프로젝트’였다. 결국 2차 대전은 미국이 개발한 원자폭탄 두 방으로 끝났다. 도심 반경 11km를 초토화한 핵폭탄을 놓고 윤리적 비난도 거셌다. 하지만 독일 나치가 먼저 개발한 것보다 낫다는 안보 논리에 모두 묻혔다.
미 의회 AI 보고서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반도체에 이어 AI가 핵무기에 비견될 ‘안보 아이템’으로 부상한 것이다. 그간 AI를 유망 기술과 산업으로 접근하던 시각과는 결이 다르다. 산업에서 안보 이슈로 전환하면서 정책의 방향도 완전히 바뀌었다.
첨단 기술 안보론은 반도체에서 먼저 불붙었다. 2022년 대중(對中) 투자를 제한하는 미국의 ‘반도체지원법(칩스법)’이 포문이었다. 중국은 주요 기반 시설의 마이크론 제품 구매 금지로 받아쳤다.
‘쩐의 전쟁’으로도 확전됐다. 미국이 527억달러(약 70조원) 규모의 보조금 계획을 내놓자 중국은 3440억위안(약 64조6720억원) 규모의 반도체 펀드로 맞불을 놓았다. 유럽, 일본, 인도 등도 가세했다. 반도체 공장 건설비의 40~70%를 보조금으로 지원하기로 했다. 이른바 ‘반도체판 맨하탄 프로젝트’가 세계 곳곳에서 펼쳐진다.
미 의회 보고서 이후 전선은 AI로 넓어질 공산이 크다. AI 역기능을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국가 안보’라는 대의 앞에 묻힐 것이다. 핵무기 개발처럼 뭉칫돈을 쏟아부어도 딴지를 걸기 힘들어진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떤가. 반도체·2차전지·전기차 등 투자세액공제를 2030년까지 연장하는 이른바 ‘K칩스법(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은 21대 국회 문턱을 끝내 넘지 못했다. AI 육성전략을 담은 ‘AI기본법’도 폐기됐다. 반도체 업계가 줄곧 요구해온 보조금 정책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국 기업은 앞으로 원가의 10~30%를 정부 보조금으로 충당한 인텔, 마이크론 등과 경쟁해야 한다.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한국은 왜 이렇게 안일할까. 근본적인 문제는 정책 당국의 안이한 정세 인식이다. 미국, 일본, 중국 등 경쟁국은 첨단 기술 확보를 ‘안보 이슈’로 격상했다. 반면에 한국은 여전히 ‘산업 이슈’로 바라본다. 안보 이슈면 국가 간 대항전이지만, 산업 이슈면 기업 간 경쟁 구조가 된다. 국회에서 기업 세액공제 연장안이 ‘부자 감세’나 ‘대기업 특혜’ 프레임에 발목 잡힌 것도 일맥상통한다. 반도체를 국가 안위가 달린 핵무기처럼 여겼다면 과연 이런 태클이 가능했을까.
한국 LCD 산업은 이제 종말을 앞두고 있다. 한때 세계 1위를 호령했지만 정부 보조금을 지렛대 삼은 중국 기업의 저가 공세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LCD 산업과 연동된 TV 세트의 패권도 중국으로 넘어갈 공산이 크다. 저가 스마트폰도 영향권이다.
제조업 주권이 이미 야금야금 넘어가고 있다. 지금은 LCD지만 머지않아 반도체와 AI 차례가 온다. 만시지탄은 LCD에서 그쳐야 한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号啕大哭)이 반도체, AI, 배터리 등에서 안 나오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