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톱박스 시스템온칩(SoC)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미국 반도체 업체 브로드컴이 결국 규제 당국의 압박을 견디지 못했다. 칩 독점 공급 계약 조항을 파기하기로 결정했다.
그동안 브로드컴의 독점 계약 조항은 경쟁사의 시장 진입을 차단하는 역할을 했다. 셋톱박스 시장에서 탈(脫)브로드컴 기류가 거세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텔레칩스와 같은 경쟁사 수혜가 예상된다.
7일(현지시간) 유럽연합은 브로드컴이 고객사와 TV 셋톱박스, 모뎀 등에 쓰이는 SoC 독점공급 계약 조항을 파기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유럽 당국으로부터 1년 이상 반독점 관행으로 조사를 받은 브로드컴은 벌금을 피하기 위해 이 같은 결정을 내렸다.
유럽연합은 2019년 6월부터 브로드컴을 상대로 반독점 행위를 조사했다. TV 셋톱박스, 모뎀 제조사와의 계약서에서 경쟁사의 통신 칩 구매를 금지하는 독점권 조항을 집어넣어 반독점법 위반을 했다는 혐의다. 같은 해 10월 조사가 마무리되지 않은 위원회는 전세계 시장 경쟁에 피해 발생을 막기 위해 임시 조치를 내린 바 있다. 당시 기존 6개업체와 체결한 계약에서 독점공급 조항을 중지하라고 명령한 바 있다.
이후 브로드컴은 독점계약 내용을 개선하겠다고 약속했다. 올해 4월 위원회는 제안된 공약 적절성을 확인하는 절차를 가졌다. 지난 7월 수정안을 걸쳐 이달 최종적으로 독점계약을 철회한다고 발표했다.
앞으로 브로드컴은 최소 수의 제품을 판매하도록 강요할 수 없다. 구매하려던 제품 외의 다른 제품 판매로 연결되도록 가격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조항도 삭제된다. 중국을 제외한 전 세계 TV 셋톱박스, 모뎀 제조사에게 적용된다. 브로드컴은 30일 이내에 이 약속을 준수해야 한다. 약정은 7년 동안 적용된다. 조항을 위반할 경우 유럽연합은 브로드컴 연간 총 매출의 최대 10%까지 벌금을 부과할 수 있다.
브로드컴은 리눅스 운용체계(OS) 기반 셋톱박스 칩 시장 점유율 1위(80%)다. 이 같은 지휘를 이용해 브로드컴은 방송 사업자와 셋톱박스 제조사에게 부당한 압박을 가했다. 터무니없는 유지보수 비용을 부과하기도 했다. 2016년 셋톱박스 칩 시장 점유율 2위(당시 20%가량)인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가 사업 철수를 선언하자 브로드컴 기세는 더 쎄졌다.
업계에서는 이번 브로드컴의 독점계약 철회로 인해 국내 기업인 텔레칩스가 셋톱박스 칩 사업을 확대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전망했다. 국내에서는 이미 탈(脫)브로드컴 움직임이 몇 년 전부터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노피아테크, 가온미디어 등 국내 셋톱박스 제조사는 브로드컴이 아닌 다른 칩을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텔레칩스는 KT의 IPTV 셋톱박스 'UHD4'에 칩 공급을 체결하기도 했다. KT는 예전에 브로드컴과, 중국 하이실리콘 칩을 탑재했었다.
그러나 텔레칩스 측은 브로드컴으로 인한 큰 수혜를 기대하지 않는다는 의견이다. 텔레칩스 관계자는 "브로드컴 독점조항 철회가 당장 우리의 셋톱박스 사업에 눈에 띄는 실적 상승을 줄 것으로 예상하지 않는다. 현재 주력하고 있는 차량용 인포테인먼트 IVI(In-Vehicle Infotainment) SoC 사업을 더 확대하기 위해 셋톱박스 사업 보다 더 많은 연구인력을 보충한 상태다"라고 말했다.
올해 상반기 기준으로 텔레칩스의 분야별 매출은 오토모티브(디지털미디어프로세서)가 약 401억원으로 TV 셋톱박스 칩 매출 13억원 보다 30배 높다. 텔레칩스 분야별 매출 비중은 오토모티브(87%), TV 셋톱박스(2%)로 오토모티브가 압도적으로 높다. 최근 텔레칩스는 IVI에 디지털 클러스터 기능을 확대한 콕핏(Cockpit)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로 분야를 확대했다. 인공지능(AI) 칩 개발에도 나섰다.